스퀘어에닉스의 신작 니어 오토마타를 이제서야 완주할 수 있었다. 구매를 위해서 컴퓨터까지 사양을 맞춰 새로 산 것이 지난 5월 즈음이었다는 것을 감안해 보면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지지부진한 진행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게임 자체의 문제였기보다는 피치 못할 개인의 사정으로 인한 것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2017년 7월 31일, 간신히 스토리상의 진엔딩이라고 불리어지는 E엔딩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수려한 캐릭터 디자인과 그래픽, 멋진 타격감과 액션, 그리고 전작인 레플리칸트에서부터 나를 사로잡았던 OST까지 이 게임에서 언급하고 싶은 좋은 것들이 잔뜩 있다. 그와 동시에 필요이상의 자극적인 소재들, 고어적인 요소들이 꼭 필요했는지 아쉬운 부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좋았던 것, 아쉬웠던 것들을 하나하나 가려보기보다는 플레이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니어 오토마타의 스토리와, 그것을 바라보는 플레이어와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기본적으로 관망하는 존재이다. 일부 작품에서 이 공고한 제 4의 벽을 의도적으로 뛰어넘는 요소들을 채택하긴 하였으나, 수많은 게임에서 게임 세계와 플레이어를 나누는 제 4의 벽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만큼이나 두껍다. 니어 오토마타에서도 이는 크게 다르지 않다. 3인칭 백 뷰로 설정된 이 게임의 인터페이스는 오버워치나 여타 공포게임들의 1인칭 시점과는 다르게 효과적으로 플레이어와 게임 속 세계를 분리시킨다. 플레이어는 자신이 조종하는 캐릭터의 등을 응시하며 세계를 탐색하게 된다.
니어 오토마타에서 그렇게 관조자의 역할을 부여받은 플레이어는 캐릭터들이 요르하 계획의 일원으로서 삶을 살고 스러지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당신에게 선택지가 주어지지만, 결과는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
니어 오토마타의 스토리는 반복성을 띄고 있다. A, B, C, D 루트가 시점의 변화와 선택지를 주어 단조로움을 피해가고 있으나 결국 뜯어보면 A+B 묶음에서 C+D 묶음으로 진행한 다음 다시 A+B로 돌아가는 구조이다.
A엔딩(2B 시점)
B엔딩(A루트와 동일 시간대, 9S시점)
↓
C엔딩(A,B엔딩 이후 특정 선택지)
D엔딩(C엔딩과 동일진행, 다른 선택지)
요르하 계획은 애초부터 기존의 안드로이드들을 전부 폐기하고 다시 새로운 안드로이드들을 만들어내 영원한 대립과 싸움을 이어나가는 순환고리이다. 이는 C루트/D루트 이후 게임을 새로 시작하면 요르하 계획이 다시 진행되면서 A루트의 강하작전이 시작되는 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절규와 고통으로 가득한 C/D루트를 끝내고 다시 A루트로 돌아오면 들려오는 2B의 독백이 마치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에필로그와 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또다시 안드로이드들은 같은 싸움을 이어나간다. 기계생명체들이 같은 방식을 반복하고 반복했듯이 안드로이드들도 운명을 반복할 뿐인 것이다.
그러나 이 게임은 플레이어를 관조자의 포지션으로 만들어 놓고는, 게임 내에서 자신이 플레이하는 안드로이드 캐릭터에 이입할 수 있는 장치를 여러가지 만들어 플레이어의 고통을 극대화시킨다. 인터페이스 자체를 시스템으로 활용하면서 때로는 플레이어 본인이 해당 안드로이드가 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2B의 재조정을 받는 이벤트에서는 내가 2B가 된 것처럼 9S의 조정을 받을 수 있으며, 이 선택은 B루트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또한 2B가 점점 망가져가면서부터는 마치 내 시야가 2B의 시야인 것처럼 행동이 제약되고 화면에 글리치로 가득 찬다. 이런 큰 이벤트뿐 아니라 로딩화면, 게임 오버 등 세세한 부분에서 이 게임은 플레이어가 캐릭터에게 이입할 수 있도록 끔찍하게 세세한 배려를 가득 넣어두었다. 캐릭터와 함께 모험을 하는 플레이어는 이렇게 자신이 게임 내 캐릭터와 동일시되는 이벤트들을 통해 조금 더 니어 오토마타의 세계에 이입하게 된다. 하지만 위에서 이야기했듯, 기본적으로 니어 오토마타는 플레이어를 벽 너머에 두고 진행되는 이야기이며, 플레이어에게 여러가지 자유도가 주어지지만 결국 이야기는 원점으로 순환하게 된다.
<니어 오토마타의 캐릭터 구조>
여기에서 니어 오토마타의 인물 구조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니어 오토마타에는 짝이 있다. 한 개체가 있으면 그에 대응하는-대립항이던 아니던-다른 개체가 존재하는 것이다. 크게는 안드로이드와 기계생명체가 있고, 요르하 부대와 대립하는 기계생명체(아담과 이브를 포함)이 있고, 대립하지않는 레지스탕스와 파스칼이 있으며, 이야기는 진전되었다가 다시 원점으로 초기화된다. 여기에 플레이어가 끼여들 수 있는 틈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폐쇄회로의 세계에서 묘한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 캐릭터가 있다. 바로 안드로이드 객체에게 주어지는 전술형 지원 유닛 - Pod 이다.
위에 언급했듯이 니어 오토마타의 모든것은 필연에 의한 것으로, 한 치의 우연이 끼여들 순간이 없이 예정된 미래를 향해서 나아간다. 그러나 Pod는 그 순환고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Pod는 초반 근접전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플레이어에게 원거리 공격이나 서포트 스킬 등 전투 지원을 주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Pod가 단순히 아이템이나 펫 정도의 포지션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게임을 진행하면서 드러나게 된다. 그들을 위한 시네마틱이 따로 존재하며, Pod는 다른 Pod와 소통하고 있는 장면들을 통해 Pod역시 스킬이나 장비가 아니라 하나의 '캐릭터'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캐릭터로서 인정받고 있는 Pod이지만, 그들은 어쩐지 서사에서 존재 이유가 부족한 채로 둥 떠있는 것처럼 보인다. 누구보다 가장 많이, 오랫동안 메인 캐릭터들과 함께하지만 그들은 A+B<->C+D 루트의 반복 속에 의문을 가질 뿐, 어떤 다른 선택이나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Pod들은 그저 캐릭터 옆에서 이 반복을 응시할 뿐이다. Pod가 단순한 장비였다면 이런 위화감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작자들은 굳이 Pod를 캐릭터의 일부로서, 서사의 요소중 하나로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제작자들이 개발 기간 부족으로 Pod의 대응되는 짝을 만들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다. 그들은 Pod에 대응되는 짝을 준비해 두었다. 그 궁금증은 E엔딩에서 해소된다. 그들의 곁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지만 결국 안드로이드와 기계생명체의 반복되는 운명을 지켜볼 뿐인 존재.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바로 우리, 플레이어이다.
플레이어와 Pod는 똑같이 니어 오토마타의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그들이 이 짜여진 서사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Pod는 그저 정해진 길을 나아가도록 안드로이드를 밀어붙이고, 전투를 조금 더 편하게 만들어 줄 뿐이다. 플레이어 역시 마찬가지이다. 때로는 1인칭 시점으로 캐릭터에 이입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에서 플레이어는 캐릭터의 등을 보며 조작한다. 그리고 언제나 결말은 같다. 요르하부대는 전멸하고, 다시 새로운 요르하 부대가 만들어지며, 기계생명체와 싸운다. 실질적으로 니어 오토마타의 이야기는 C/D엔딩에서 끝나기 때문에, 이것만 놓고보면 정말로 이 세계는 엉망진창이고, 망가졌고, 단 한줌의 희망도 없는 그런 부서져버린 이야기에 불과하다. C/D엔딩을 본 플레이어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왜 이 모든 것이 반복해야만 하는가? 어째서?"
그리고 자신이 가상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에 아무것도 손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희망은 없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서 E엔딩이 등장한다. 제작진들이 준비한 Pod라는, 플레이어에 대응하는 캐릭터가 여기서 관조자의 역할을 포기하고 제 4의벽 너머로 손을 뻗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아니다, 수많은 Pod가, 그리고 수 많은 플레이어가 4의 벽 너머에서 손을 뻗으면 이 폐쇄회로의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메세지를 던진다.
<니어-오토마타의 E엔딩>
이 역할을 Pod가 맡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그들은 시스템 조작을 보조하며, 그것은 캐릭터의 전투를 돕는다는 설정이 붙어있지만 1차적으로는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와 밀접하게 엮여있다. 그들만이 볼수 있는 화면은 사실 플레이어에게 모두 노출되며, Pod는 이 사실을 인지하고, D엔딩 마지막에 플레이어를 향해 제안을 해온다. 이 제안을 수락하는 순간 A/B<->C/D의 루프에서 벗어나는 E엔딩의 길이 열린다. 이 경험은 굉장한 감정적 쾌감을 동반한다. 왜냐하면 제 4의 벽을 넘어 절망만이 반복되는 세계에 새로운 희망을 주는 순간을 플레이어가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세계(게임스토리)를 재편성하는 것과 같아서, 플레이어는 D엔딩으로 끝났어야만 하는 게임 내 모든 요소를 Pod로서 제거하는 플레이에 돌입한다. 그리고 이 경험은 단지 플레이어 개인 한명의 경험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의 니어 오토마타를 플레이하는 모든 게이머들을 잇는다. 마치 Pod가 서로 소통하듯, 여태까지 혼자 플레이해오던 플레이어는 다수의 연대를 경험한다. 이 연대를 강조하는 것처럼, E엔딩의 흐름은 하나의 목소리가 점점 다수로 바뀌어 결국 희망을 여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기존의 게임들이 가상 세계가 플레이어를 인식해 제 4의 벽을 넘는 포지션을 선택해 왔다면, 니어 오토마타는 역으로 제 4의 벽을 플레이어가 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 차이라고 할 수 있다. Pod는 플레이어의 상징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주인공 뒤의 플레이어를 인식하는 여타 게임들의 메타요소와는 달리, 주인공 캐릭터 옆의 보조장비를 플레이어로 상정하고 있는것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이렇게 서사에서 플레이어를 방관자로 포지셔닝하고, 직접적으로 이 게임 세계를 개변하도록 종용하고 있는 것이 바로 니어 오토마타인 것이다. 플레이어는 여태껏 전지전능한 존재로 여겨져왔다. 게임 세계를 조종하며, 캐릭터들을 때로는 무자비하고 잔혹하게 다루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사랑을 주었다가 버리기도 하는 주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실상 아무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무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가 제 4의 벽을 의지로 뛰어넘을 수 있기에, 이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주는 감동은 조금 더 특별하지 않은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