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면라이더/가면라이더 제로원

[스포] 가면라이더 제로원 5화 ~ 29화 감상 정리

그간 이런저런 바쁜 일이 많아서 특촬은 계속 보고 있었지만 감상글을 남길 짬이 없었습니다. 사실 이런 4쿨짜리 장편 드라마는 에피소드 별로 한 편씩 감상글을 남기는 것보다 조금 더 큰 단위로 끊어서 보는 게 이야기 흐름이나 주제를 더 쉽게 캐치할 수 있는 면도 있어서 어느정도 서사가 쌓일 때까지 기다렸던 부분도 있기도 하구요. 제로원은 전개가 특히나 빠른 편이라, 초반 1쿨에서는 작품이 하고 싶은 메세지가 뭔지 쫓아가기는 커녕 휴머기어에 대한 설정이나 세계관 파악하느라 더 정신없었던 기억이 있네요. 또 작품 내의 이해관계 진영이나 캐릭터들도 굉장히 복잡한 구조로 얽혀 있어서, 관계도를 그리는 것만으로도 아찔할 정도로 촘촘하고 섬세합니다. 그만큼 캐릭터들이 입체적이에요.

다행히도 29화까지 달려온 지금 시점에서는 어느정도 가면라이더 제로원이 말하고자 하는 테마와 주제의식이 단단하게 자리잡았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가장 초반에 던져놓았던 떡밥들을 다시 하나씩 회수해나가고 있는데 이것들이 최종장에서 어떤 식으로 발전되어 마무리될지가 상당히 기대됩니다. 30화부터는 작품의 전개도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 걸 보니 아마 이 시점부터 3쿨 분량에 들어가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간의 제로원이 이야기해온 주제의식과 메세지에 대해서 한번 정리하기에도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글쓰기 버튼을 누르게 되었습니다.

4화까지 썼던 감상글이 있는지라 5화부터 29화까지라고 타이틀을 달았습니다만 당시에 썼던 감상글은 워낙 초기에 적은 글이라 아직 정리가 안 된 부분도 있어서 본 포스트 내에서 1~4화 분량의 이야기도 종합적으로 다루게 될 것 같으니 해당 부분 감안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전개해온 이야기들의 분량이나 작품내에서 등장한 메세지들만 해도 엄청나기때문에 가능한 모든 이야기들과 화두를 다루고 싶습니다만 그러다보면 글이 밑도끝도없이 길어질 게 분명하므로 최대한 메인 스토리 중심으로 중요한 부분들만 짚어보고자 합니다. 제가 언급한 것들 외에도 여러가지 생각할 여지를 많이 주는 재미있는 작품이므로 꼭, 직접 해당 작품을 시청하시길 추천드리겠습니다. 아래의 글은 가면라이더 제로원 29화까지의 이야기에 대해 전반적으로 스포일러하고 있으니 당 작품을 보신 분들만 읽어주시길 권해드립니다. 

더보기

 

가면라이더 제로원의 지금까지 흐름은 크게 두 토막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세계관과 인물들을 소개하고 앞으로의 전개에 대한 떡밥을 뿌려놓았던 1쿨 파트(1화~16화)와 5번의 직업 승부를 거치면서 제로원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 방향성을 잡아가고 전개를 다져놓은 2쿨 파트 (17화~29화)입니다. 본 글에서는 이 메인스트림 속에서 각 캐릭터들이 어떤 식으로 성장해가고 제로원의 주제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서술해나갈 예정입니다.

1쿨에서는 주로 휴머기어에 대한 설정과 각 라이더 진영, 그리고 주 캐릭터 소개를 겸하면서 인공지능이 섞여든 인간 사회의 모습이 어떤지에 대해 그리는 에피소드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제로원의 1쿨은 기존의 로봇 SF물의 클리셰와 유사하게 흘러가는 모양새를 보입니다. 인간의 삶을 돕는 휴머기어가 있고, 그 휴머기어들을 해킹해서 인간들의 멸망을 꾀하는 단체가 있죠. 이들을 막기 위해 우리의 주인공인 히덴 아루토가 가면라이더 제로원으로 변신해 휴머기어들의 폭주를 막고 인간을 지킵니다. 이 구도는 8화에서 멸망신뢰 단체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제법 빠르게 굳어지는데요. 멸망신뢰가 개발되었다 불발된 인공위성 아크를 필두로 움직이는 휴머기어들이라는 점은 인간에게 반기를 드는 로봇이라는 기존 SF의 클리셰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1쿨의 흐름은 인간의 멸망을 꾀하는 멸망신뢰와의 대립을 메인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히덴 인텔리전스와 에임즈 두 단체가 맞서고 있는 모양새를 보입니다.

다만 여기서 제로원이 조금 클리셰에서 비켜나가고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비록 1쿨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인간과 로봇의 대립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을 중심으로 두고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인간들이 대립하는 구도를 조성해나가고 있는 점입니다. 1쿨에서는 에임즈의 후와, 유아가 주인공인 아루토와 이 지점에서 서로 다른 관점을 보이면서 갈등을 이끌어나가죠. 후와는 강경한 인공지능 반대파이고, 유아는 일견 인공지능을 긍정하지만 이용할 수 있는 도구로서의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휴머기어를 긍정하고 인간과 동등하게 바라보는 아루토와 대비됩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서 아루토의 이 '휴머기어 긍정론'은 상당히 빈약하게 느껴집니다. 그것은 이 시기의 아루토의 주장에 근거가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8화에서 아루토는 빠르게 자신의 한계에 직면합니다.

 1화에서 아루토는 개그맨으로서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수도 있지만, 가면라이더 제로원이 되어 사람들을 지킴으로써 되찾는 웃음에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제로원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휴머기어는 대단한 존재이고, 사람들의 꿈의 머신이라고 말합니다. 휴머기어가 폭주해서 사람들을 습격하고 있는 와중에도요. 이러한 태도의 반복은 일견 아루토가 유우부단한 이상주의자처럼 보여지게 합니다. 휴머기어 아버지에게서 자랐다는 특수한 과거환경이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사람들이 모두 휴머기어를 긍정해야한다는 설득시킬만한 메세지를 전달할 수는 없거든요. 그렇기에 1쿨의 아루토는 적나라한 비판을 마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실제로도 극이 진행되면서 아루토는 주변의 '현실'을 대변하는 캐릭터들로부터 지적을 받는 모습을 종종 보여줍니다. 가깝게는 히덴 인텔리전스의 부사장 일동이 있겠고, 멀게는 1쿨에서 관점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에임즈의 후와나 유아와도 부딪치고 있죠. 이 아루토의 한계는 8~9화의 병원 에피소드에서 극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휴머기어는 좋은 존재라고 외치는 아루토 앞에서 해킹당한 휴머기어들이 단체로 깔깔 웃음을 터트리는 모습은 그의 '근거없는 긍정'이 얼마나 얄팍하고 빈약한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는 아루토 역시 성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다행인 것은 여기가 이 작품의 1쿨이라는 거죠.

아루토에게 필요한 것은 근거입니다. 왜 휴머기어가 꿈의 머신인지, 그리고 왜 휴머기어를 긍정해야하는지는 제로원 2쿨 파트에서 명확해집니다. 에임즈에서 유아가 떠나고 자이아 엔터프라이즈가 전면으로 등장하면서, 제로원은 1쿨에서 무섭고 두렵게만 그려졌던 휴머기어의 폭주의 이면을 주목하는 동시에 인간과 휴머기어에 대해서 보다 디테일하게 파고들기 시작합니다. 이를 위해서 등장한 것이 바로 5번의 직업 승부입니다. 


2쿨에서 제로원이 특징적인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 직업 승부인데요. 인간과 인공지능이 서로 한가지 부문에 대해서 어느쪽이 더 우수한지를 승부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전에 있었던 구글의 딥마인드 챌린지나, 그보다 훨씬 더 과거에 있었던 인간과 컴퓨터의 체스 대결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로원이 이 지점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이러한 인간 vs 인공지능의 승부를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그저 '다름'을 서술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보통 인공지능과 인간을 나란히 두었을 때 우리는 어느쪽이 더 우수한지 증명하려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승부에 대한 결과는 늘 미래에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자리를 하나씩 잠식해버릴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거나, 아직 인간성은 지켜졌다는 안도감을 표현하는 데 그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요. 

17화 꽃꽂이 승부. 예술은 오랫동안 인간의 영역으로 여겨진 분야입니다.

제로원이 2쿨에서 그리고 있는 5번의 직업승부에 대해 혹자는 같은 패턴이 계속 반복되어 답답하고 지루하다고 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만 사실 이 작품이 굳이 지루할 수도 있는 5번의 승부를 오랫동안 자세히 그리고 있는 이유는 이 대결주제들을 통해서 제로원이 말하고 싶은 주제의식을 발전시켜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2쿨의 직업승부는 작품이 시청자를 설득하는 과정이자, 아루토가 휴머기어는 꿈의 머신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를 얻어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인공지능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알 때,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방향성을 잡을 수 있습니다.

5번의 직업 승부는 각각 예술(꽃꽃이), 서비스(부동산 영업), 도덕(재판), 생명윤리(구조), 정치(투표)라는 추상적이고 이전부터 인간의 영역으로 받아들여져 오는 테마들로 구성되어있습니다. 1쿨에서도 휴머기어가 인간사회 녹아들어있는 모습들을 다양한 직업을 통해 묘사해온 제로원입니다만 2쿨에서는 보다 본격적으로 로봇이 대체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의 승부를 묘사하는 데 있어 작품이 유지하고 있는 시각은 인간이나 인공지능 어느 한 쪽을 지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라서 가능한 것'과 '휴머기어라서 가능한 것'을 모두 보여주면서도 제로원은 어느 한 쪽이 더 우수하거나 뛰어나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과 달리 오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이나 외부 환경을 의식하지 않고 주어진 목적에 충실할 수 있기에 고객에게 가장 알맞은 제안을 할 수 있었던 휴머기어의 모습(부동산 영업 승부 19-20화)이 보여지는가 하면, 심정지 상태의 인간을 죽은 것으로 판단해 살 수도 있었던 사람을 무시하는 모습(소방 승부 26-27화)도 함께 보여줍니다. 이러한 '차이'를 묘사해 나가며 제로원은 인간과 휴머기어가 어떻게 관계맺을 수 있는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이는 꽃꽂이 에피소드(17-18화)와 소방 승부(26-27화)에서 조금씩 그려지다, 5번 승부를 끝맺는 마지막 대결인 투표 대결(28-29화)에서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18화: 휴머기어가 배운것은 인간으로부터.

꽃꽂이 대결에서 휴머기어는 인간에게 꽃꽂이에 대한 마음을 다시 가르쳐 줍니다. 인명 구조 승부에서 인간은 휴머기어에게 생명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인상적인 것은 이 주고받음 또한 일방향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휴머기어가 인간에게 꽃꽂이에 대한 마음을 가르쳐 줄 수 있었던 것은 그 또한 인간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서 배운 휴머기어는 다시 그 배운것을 인간에게 돌려 줍니다. 이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도, 휴머기어도 지금껏 몰랐던 새로운 가능성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25화에서 아루토가 말하는 '꿈'으로 귀결됩니다.

25화에서 말하는 아루토의 꿈은 보다 구체화된 모습입니다.

 돌아보면 제로원은 처음부터 계속 꿈이라는 키워드를 강조해왔습니다. 히덴 인텔리전스의 캐치프레이즈는 "꿈을 향해 날아라" 이고, 아루토는 휴머기어는 꿈의 머신이라고 말해왔죠. 처음에는 왜 꿈이라는 것을 강조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아루토 역시 처음에는 막연하게 말해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휴머기어와 인간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어떤 가능성을 펼칠 수 있는지 아루토는 직업 승부를 통해서 그 미래의 단편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줄곧 외쳐왔던 휴머기어는 꿈의 머신이라는 말은 2쿨에 와서야 단단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결국 꿈의 머신이라는 표현은 휴머기어가 인간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보조할 것이라는 알량한 인간중심주의가 아니라 휴머기어가 인간에게 보지 못한 미래를 열어 줄 수 있는 가능성의 열쇠가 될 수 있다는 뜻이었던 것입니다. 

29화: 하지만 현실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멋진 미래로 향하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과 동등하게 때로는 그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다른 존재들에게 인간은 가차없이 거부반응을 보입니다. 그 근간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부동산 영업승부나 꽃꽂이 승부에서 그려진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입지를 위협받을 것을 두려워하고, 어떤 사람들은 통제 불가능한 휴머기어로 인해 발생할 응급상황들을 두려워합니다. 휴머기어를 자신의 생계를 빼앗는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직업 승부의 꽃꽂이와 부동산 영업 편에서도 그려진 부분이지만, 29화에 이르러 보다 노골적으로 묘사됩니다. 호소하는 아루토에게 한 시민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과 다르지 않다면, 굳이 휴머기어가 있을 필요도 없잖아. 우리 밥그릇이나 안 뺏으면 다행이지." 휴머기어의 등장으로 인간은 대체 가능한 존재가 되고, 나아가 자신의 목숨을 위협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그들이 휴머기어에게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도록 만듭니다.

17화: "인공지능과 동등한 사고능력을 인간에게 부여하는" 이라는 수식어에 주목

 그렇기 때문에 자이아 엔터프라이즈는 '배제'라는 키워드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초반에는 유아를 통해 에임즈 뒤에서 암약해오던 자이아는 2쿨부터 본격적으로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자이아 일본지사의 대표인 아마츠 가이(그러나 한일양국에서 본명보다 천퍼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는)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에 대해 기존의 프로파간다를 적극 활용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인간성은 아직 죽지 않았다고 호소하며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이 보다 우월하다고 선동합니다. 히덴의 휴머기어에 대항해 자이아가 내세우는 것이 인간을 보조하는 첨단기기인 '자이아 스펙'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자이아가 휴머기어와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고 싶어하는 지 엿볼 수 있습니다.

자이아는 인간이 휴머기어를 통제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를 위해 휴머기어의 안 좋은 부분을 의도적으로 드러내어, 이렇게 난폭한 존재는 있어서는 안된다고 매도합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레이드라이저를 장착시켜, 휴머기어를 제압하는 것을 인간을 위한 정당방위로 포장합니다. 29화에서 레이드라이저에 대해 추궁하자, 아마츠 가이는 "레이드라이저의 가치도 모르는 주제에." 라고 일축합니다. 그는 레이드라이저를 통해 민간인 또한 라이더로 변신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인간이 더욱 진화하고 휴머기어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 말합니다. 더욱 강한 힘은 일견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돌아보면, 자이아는 항상 더 강한 힘과 무기를 추구해 왔습니다.(9화에서 히덴도 병기를 개발하고 있었나 라고 말하는 유아의 대사에 주목) 그러나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일까요? 힘이 주어진다면, 인간은 더 나은 미래를 살 수 있을까요? 

작품은 꾸준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휴머기어가 폭주하여 인간을 습격하는 것만 보았을 때에는 휴머기어가 악인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제로원은 이 폭주가 '왜'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에 주목합니다. 인간이 휴머기어를 두려워하는 감정의 근간에는 휴머기어가 특이점을 각성하여 진화했을 때, 인간에게 악의를 가지게 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습니다. 1쿨의 병원 에피소드에서 유아의 질문, "싱귤레리티가 발생했을 때, 휴머기어에게 선의가 깃든다고 생각하는가"에서 이 생각이 잘 드러납니다. 그러나 애시당초 휴머기어는 어떻게 악의와 선의를 알게 되는 걸까요?

과학기술은 가치중립적입니다. 하나의 연구결과는 사실로서 존재하지만 그 결과를 어떻게 이용하는가는 인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휴머기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공지능은 중립적이지만 인간이 그들에게 무엇을 학습시키는가에 따라 선의도 악의도 깃들 수 있습니다. 멸망신뢰는 왜 인간의 파멸을 바라게 되었을까요? 그들의 중추에 있는 위성 아크는 왜 그렇게 판단했을까요? 작품은 이 일련의 물음 뒤에 인간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이아의 사장 아마츠 가이가 아크에게 인간의 악의를 학습시켰고, 이에 따라 위성 아크에게 악의가 깃든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아크의 통제를 받는 멸망신뢰는 그 의지를 따라 휴머기어들을 해킹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인간을 습격하게 되었습니다.

24화: 선의가 다시 선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감동적입니다.

그들이 인간에게 보이는 선명한 악의는 결국 본디 인간들이 가지고 있던 악의를 다시 되돌려 준 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아루토는 메탈 크로스 호퍼로 변신하게 되면서 이를 두 눈으로 목도했고, 왜 휴머기어가 인간을 습격하게 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항하는 요소로 제로원이 보여주는 것은 선의입니다. 아루토가 휴머기어에게, 또 인간이 휴머기어에게 보여주었던 선의는 다시 또다른 선으로 돌아옵니다. 이를 통해 아루토는 아크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29화의, 아루토가 시민들에게 호소하는 말은 이 모든 과정을 담은 제로원이라는 작품의 핵심이나 다름없는 메세지라고 생각합니다.

"휴머기어는 우리들 인간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들이 올바르게 이끌어준다면 그들도 올바르게 러닝해서, 멋진 파트너가 됩니다! 우리들 인간도 똑같지 않습니까. 가족이나 학교, 친구, 여러가지 환경으로부터 여러가지 영향을 받아서, 성장해서, 바뀌어가는 게 인간이지 않습니까! 비록 지금은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꿈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면 웃을 수 있는 미래가 기다린다고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가면라이더 제로원이 말하는 '악'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악의가 휴머기어에게 작용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도, 작품은 그 인간의 악의는 또 어디에서 오는지 파헤칩니다. 만약 단순하게 인간들이 휴머기어를 나쁘게 대해서 그런 것이다 라고만 말할 것이었다면 굳이 초반의 직업 승부들에서(꽃꽂이 편, 부동산 편) 인간 대표로 뽑힌 이들의 고뇌를 그릴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단순히 인간이 나쁘다 라고만 비난하기에는 인간들에게도 자신의 사정이 있습니다. 그들이 필사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결국 정해진 수의 직업이라는 의자에 나를 앉힐 지, 휴머기어를 앉힐 지 결정하는 게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과를 보이지 않으면 대체당한다, 생존할 수 없게 된다는 두려움은 비단 휴머기어가 있지 않더라도 경쟁으로 가득한 현대사회의 기저에 언제나 깔려 있습니다. 너 말고 일할 사람 많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한번씩은 스쳐 지나가듯 들어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제로원의 메세지는 단순히 인간과 인공지능을 가리키는 데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사회적 함의를 가지게 됩니다. 산업혁명과 함께 태동한 자본주의는 인간 사회를 엄청나게 성장시켰지만, 생산수단을 일부의 자본가들이 독점하게 함으로써 인간을 도구화시키는 폐해를 불러왔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얻은 권력을 통해 약자를 억압하고, 저항하지 못하도록 선동합니다. 이렇게 계급화, 구조화된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위를 향해 분노하기보다는 자기보다 더 약한 이들에게 더 손쉽게 분노합니다. 휴머기어에게 분노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휴머기어가 어떤 의지력이 있어서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정해진 크기의 파이에서 휴머기어가 제 몫을 빼앗아간 것처럼 여기고 그들에게 화를 냅니다. 작품은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파이의 크기를 정해버린 사람, 자리의 숫자를 정해버린 사회구조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8화: 천퍼사장의 가증스러운 행태 (빨리 심판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이아 엔터프라이즈의 일본 지사 대표인 아마츠 가이는 바로 그 사회계급의 화신과 같은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선동하고, 휴머기어를 배제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위해서 휴머기어를 일부러 폭력적으로 대하고 그들이 저항하고자 분노하면 이거 봐라, 이래서 휴머기어는 안 된다고 조롱합니다. 어딘지 익숙하지 않나요? 이러한 모습들은 끊임없이 억압당하던 약자들이 분노해 일어나면 이래서 ㅇㅇ는 안 된다며 폄하하던 무수한 우리 사회 안의 권력자들을 겹쳐보게 만듭니다. 그는 마치 인간성을 수호하는 우리 사회의 영웅처럼 포장되지만 - 그걸 대변이라도 하듯 아마츠 가이의 패션은 언제나 백색으로 무장하고 있죠 - 실상은 자기 밑의 사람들도 가차없이 도구로 대하는 차별적인 시각의 소유자입니다. 인간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휴머기어는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된다 말하지만, 조금만 잘 들여다 보면 그의 주장에 별달리 설득력이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휴머기어는 이래서 문제라고 말하지만, 해당 문제는 인간도 똑같이 가지고 있죠. 이를 통해 결국 아마츠 가이는 그저 사람들을 선동해서 자기 권력을 지키려는 알량하고 가증스러운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것들이 남에게서 갈취한 것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실상이 얼마나 보잘것없을지도 함께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제로원이 휴머기어와 인간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앞서 말씀드렸는데요. 작품은 이를 통해서 바람직한 미래에 대한 메세지를 전달함과 동시에, 인간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범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인간이 우월하고 로봇은 인간만큼 대단하지 않다는 기존의 편견에 이래도 인간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인간이란 무엇인지 역으로 질문해오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후와와 유아는 바로 이 지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캐릭터들입니다. 후와는 휴머기어들의 폭주로 인해 일어난 데이브레이크의 피해자로 이 사건이 원인이 되어 휴머기어를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초반에 그렇게도 싫어했던 휴머기어에게 생명을 구해지는 사건을 통해 심경의 변화를 겪게 됩니다. 휴머기어에게 습격당했던 기억 위에 휴머기어에게 구해지는 기억이 더해지며 후와는 휴머기어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나갑니다. 덕분에 주변에 휴머기어들만 남은 아루토에게 의지가 되어줄 수 있었던 점은 개인적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9화: 살아간다면 계속해서 새로운 기억이 쌓입니다.

하지만 후와는 어찌되었던 인간에 대해서 보수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캐릭터입니다. 좋은 휴머기어도 있다는 지점까지 발전했지만 그는 여전히 인간과 휴머기어는 다르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멸망신뢰가 제압되고, 에임즈에 구금된 호로비를 심문하며 점점 미궁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본디 휴머기어만이 폭주한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2쿨에서는 인간들도 변신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인간들이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인가? 그리고 후와는 어떻게 아크의 접속이 필요한 어설트 기어를 사용할 수 있었는가? 이러한 의문들은 29화에서 폭발하듯이 충격적인 진실을 드러냅니다.

테세우스의 배라는 역설이 있습니다. 낡은 배의 판자를 새 판자로 하나씩 교체해 기존의 판자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과연 원래 테세우스의 배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입니다. 인간과 로봇을 테마로 하는 작품에도 종종 등장하는 문제인데 몸의 일부를 기계로 대체한 사람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식으로 던져지곤 합니다. 이를 겨냥한 것처럼 제로원에서는 다양한 존재방식이 그려집니다. 인간이 있고, 인공지능이 있다면 인간과 인공지능이 합쳐진 존재는 또 어떻게 정의해야할까요? 또 인간처럼 사고하는 인공지능은? 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요? 제로원의 후와와 유아는 이 문제의 중심에 있습니다. 이 두사람의 이름을 붙여 읽어보면 Who are you, 당신은 누구인가 라고 질문하는 모양새가 됩니다. 그 말처럼 제로원은 기존의 인간관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순히 유기물, 무기물로 가르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를 인간이라고 해야할지 다시 정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로원은 여기서 다시 꿈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합니다. 29화에서 후와는 이렇게 말합니다.

"휴머기어를 쳐부순다, 그 다음에는 뭐가 있을지 꿈 같은 것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내 꿈을 발견해 주겠다. 내가 나로 있기 위해서."

이전의 후와는 자신이 왜 그래야 하는지 생각하지도 않고 휴머기어만 보면 무조건적으로 적대부터 튀어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마치 주어진 의무만을 수행하는 기계처럼 행동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죠. 그러나 지금의 후와는 휴머기어를 보고, 아루토를 보고 변화했습니다. 이제 그는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변화한 것은 후와만이 아닙니다. 인간이 변화했듯, 휴머기어도 변화했습니다. 25화에서 다시 돌아온 진에게도 '꿈'이 있습니다. 그가 바라는 미래는 휴머기어에게 자유를 찾아 주는 것입니다. 그가 자기의지를 가지고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진이 아크에 접속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통해 드러납니다. 때문에 멸망신뢰 내에서도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데요, 과연 갑자기 어른이 되어 돌아온 아들래미는 여전히 아크에 종속된 호로비에게 무슨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이 둘은 또 이 둘대로 굉장히 흥미로운 구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점점 구도가 복잡해집니다.

이렇게 속속들이 각자의 꿈과 의지가 보여지는 와중에, 아직 유아의 꿈은 보여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초반에 에임즈에서 있을 때는 즐거워 보였던 유아는 그녀의 본거지인 자이아로 넘어가면서부터 빠르게 표정을 잃었습니다. 아마츠 가이의 오른팔로서 주어지는 임무에 망설이면서도 결국은 이것이 자신의 의지라고 되뇌이는 모습이 계속 그려져 제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소방 승부편에서 보였던 소심한 저항의 싹이 순식간에 사그러드는 모습이나, 사장 명령은 절대적이라고 후와에게 화내던 모습들을 보면 내면의 갈등이 엄청나게 심한 것 같아 보이거든요. 하지만 유아 역시 후와와 마찬가지로 라이더 변신을 위해 통제받고 있는 부분들이 있지 않을까, 그로 인한 오래된 족쇄가 유아가 한 걸음 내딛는 것을 막고 있는 건 아닌가 추측해보고 있습니다.

9화: 이미 유아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 회의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족쇄가 라이더 작품에서 빠지지않고 등장하는 부자관계의 일환이 아닐까 예상하고 있는데요, 굉장히 복잡한 제로원의 관계도입니다만 크게 세개의 진영(히덴, 멸망신뢰, 자이아)으로 나눌 수 있는 작품 속 진영관계에서 자이아만 부모자식간의 관계가 나오지 않았거든요. 아루토는 아루토-소레오의 관계가, 진은 진-호로비의 관계가 있는데 자이아의 유아-가이만 정확한 관계도가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둘이 친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녀관계 비슷한게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있는데요. 일반적으로 아무리 오른팔이라고 해도 일개 회사원을 저렇게 항상 대동하고 다니고 이름을 부르고 하지는 않잖아요...? 라이더 작품의 꽃은 특촬애비 몰락시키기이기도 하니 어떤 형태로든 그 형장의 주역이 유아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금이야 많이 드러나지 않지만 유아 역시,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휴머기어는 도구이고, 사람이 쓰기 나름이라고 말했던 유아였지만 병원 에피소드를 통해서 제 생각 없이 그저 도구에 의지하려고 했던 자신의 모습을 자책하기도 했고, 아루토나 후와가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습들도 지켜보았습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유아와 후와의 관계도도 굉장히 매력적인 지점 중 하나인데 남성과 여성 라이더가 스스럼없이 엮이는 것도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지고 유아를 대하는 후와의 태도가 내가 너를 구해주겠다 라기보다는 너를 정신차리게 하겠다에 가까운것도 맘에 듭니다. 특히 소방서 편에서 유아를 끌고나가는 장면은 손에 꼽을만한 명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내일로 30화에 접어드는 제로원은 히덴이 자이아의 자회사가 되고, 아루토가 회사를 떠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예고편으로 미루어보아 지금까지 히덴 인텔리전스라는 회사의 대표로서 현실과 부딪쳤던 아루토는 이제 그 개인으로서 멸망신뢰와 엮이게 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탄탄하게 쌓아놓은 전개를 기반으로 3쿨에서는 또 어떻게 전개될지 정말 기대됩니다. 과연 제로원은 인간과 인공지능에 대해 어떤 답을 내릴 것인지, 또한 앞으로 우리는 인간을 어떻게 정의해야할 것인지 그 결말을 어떻게 풀어놓게 될까 작품이 한주한주 진행될때마다 감탄하며 지켜보고 있는데요. 시국이 시국인지라 촬영하는 사람들 모두 무사히, 건강하게 좋은 작품을 잘 마무리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