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세이 파이널을 보았습니다. 정말 갑작스럽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즈도 가이무도 포제도 고스트도 보지 못하고, 심지어 빌드마저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헤이세이 파이널을 보았지요. 어쩔 수 없었어요. 불가항력이었거든요. 그때가 아니면 헤세파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좋은 영화였어요. 심지어 오즈는 5화까지밖에 못봤는데 영화관에서 세번 울었습니다. 어쨌든 헤세파 보러 일본 가느라 제가 블레이드 감상글을 좀 늦게 쓰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블레이드 감상글입니다. 이걸로 가면라이더 블레이드도 끝이네요. 켄자키 카즈마라는 친구를 켄자키 하지메로 오해하기도 하고, 은행나무를 보기 전에 고라이더를 보는 바람에 오만 스포를 다 당했지만 마지막이란 남다른 것 같습니다. 마지막화라는 사실만으로도 묵직한 울림이 있었거든요. 이렇게 또 하나 마무리되는 이야기가 있네요. 그럼 시작합니다. 블레이드 47~49화입니다. 세계의 마지막을 향해서.
아래의 글은 블레이드 47~49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해당 작품을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은 필히 여기까지 보신 뒤에 읽어주세요.
블레이드 47화입니다. 무츠키의 어찌보면 안일한 교섭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세계를 지배하는 다수자와 그 다수를 탈환하기 위해서 싸우는 소수자의 시각으로 읽는 블레이드도 나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블레이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부분이 아니니 무츠키의 비중이 그다지 많지 않은 거겠죠. 카테고리 킹은 킹 자신의 방법으로, 자신의 승리와 종족의 해방을 위해서 나아갑니다.
켄자키는 하지메에 대해서 굉장히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주는데요. 저도 가끔씩 그 무한한 신뢰를 만들어내는 동력이 무엇인가 궁금해집니다. 하지만 켄자키가 초반에는 타치바나씨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냈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냥 켄자키는 사람을 잘 믿는 성격이 아닌가 합니다. 타치바나씨가 그렇게 정신 못차리고 방황하는 동안에도 켄자키는 타치바나씨가 바른 사람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를 올바른 길로 돌려놓기 위해서 노력했으니까요. 물론 잠깐 언어중추에 문제가 왔던 건 어쩔 수 없지만요. 그런 것을 고려하면 켄자키가 하지메를 무조건적으로 믿어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잠깐 갈등과 분노에 휩싸여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타치바나가 배신했나? 라고 생각했을 때 그는 괴로워했고, 하지메가 사람들을 해치는 놈들과 같은 언데드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그 이들을 믿는다고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은 켄자키가 진심을 다하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는 비록 우스꽝스러워질진정 항상 모든것에 진심으로 부딪치거든요. 그리고 그 진심으로 부딪친 곳에서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것을 발견했을 때 켄자키는 손쉽게 그걸 인정하는 유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을 다 내보이기에 그만큼 타인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음, 하지만 수없이 배신당했으면서 늘 누군가를 믿어주고 있는 걸 보면 그냥 영 의심을 안 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타치바나씨처럼요. 그리고 그 순수한 신뢰에 오히려 상대방이 감화되는 프로세스일지도 모릅니다.
무츠키는 여전히 자신의 위치에 불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후반부 들어 무츠키라는 캐릭터에 많이 공감하게 되는데요. 저도 무츠키처럼 좀 타협해가면서 대충 살고싶은 소시민이거든요. 그런 저에게 갑자기 뭔 힘이 주어진다면 켄자키씨나 타치바나씨처럼 책임감을 느끼긴 커녕 부담스럽게 생각할 게 분명합니다. 무츠키를 보세요. 내가 라이더를 해도 되는걸까 이 운명을 받아들이는게 맞는 건가 계속 고민하고 있잖습니까.
가면라이더의 인물들은 라이더가 된다는 운명에 맞닥뜨리고 그 운명을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끌어 나가고 있습니다. '라이더'라는 운명이 주어졌을 때 무츠키도 다른 라이더들처럼, 켄자키나 타치바나씨처럼 시련을 극복하고 강해지는 운명을 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무츠키는 그런 운명을 동경하며 싸우는 것도 하나의 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더 강한 이의 조력자가 되어 함께 싸우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조력자는 이야기의 주역이 되기엔 부족한 것이 사실이죠. 무츠키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언젠가 이 싸움이 끝날 때, 그 마지막 마무리를 짓는 것은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끝을 맞이했을 때, 그건 과연 라이더로서의 운명에 맞서서 이긴것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저 이번에도 다른 주역들의 도움에 기대어 반쪽짜리 승리를 거머쥔 것 뿐일까요? 무츠키가 알고 싶은 건 아마 그 문제일 것입니다. 자신은 약하다. 이 싸움에서 더 강한 사람들은 내 주변에 있다. 나는 그들을 서포트하는 것밖에 할 수 없어. 이런 모습과 고민들은 초반에 무츠키가 자신을 최강이라고 암시하듯 말했던 장면과 겹쳐집니다. 내가 직접 싸워서 이긴 게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라이더라는 짐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 그건 운명을 이긴것인가. 저는 그 물음에 누구나 자신만의 싸움이 있었다고 답하겠습니다. 자신의 고민과 갈등은 그 누구도 대신 싸워줄 수 없습니다. 켄자키의 싸움을 무츠키가 대신 싸울 수 없듯이, 무츠키가 가지고 있는 고민은 주변의 도움을 받더라도 자신이 이겨내는 것입니다. 주변의 도움은 지원이 될 뿐, 그 도움을 받아 움직이기로 결심하는 건 결국 자신입니다. 무츠키는 그만큼 열심히 자신과의 싸움을 해왔습니다. 그 역시 나름대로 자신의 운명을 이끌어나가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제와서 하지메가 그 설산에 있었던 이유가 밝혀집니다. 진상이 밝혀지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하지메가 왜 이 비밀을 끝까지 숨기고 싶었했는지 느껴져 가슴아픈 장면입니다.
모든것을 파괴하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에게 왜 이성과 의지를 주었을까요. 집행자같은건 그냥 바나나로 만들어져 있어서 인공지능마냥 기동되는 편이 나았을 지도 모릅니다. 이 이야기를 하니 스퀘어에닉스의 최근 신작 게임이 생각나네요. 거기도 이쁘장한 은발 안드로이드들이 나오거든요. 애초에 단순 파괴를 위해 만들어진 이레귤러라면 의지를 갖지 않는 것도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결국 하지메라는 존재는 그 메마른 땅 속에서 힘겹게 피어나왔습니다. 가장 가망이 없다고 여겨진 대지에서 만들어진 한송이 꽃 같은 거죠. 그리고 그 꽃은 자신이 어떤 땅에서 자라고 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가요. 자신이 살아있으면 그 땅은 결국 모든 것을 삼키고 말 겁니다. 이제 막 싹을 틔운 자아에게 존재의 소멸이란 상상 이상의 공포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아는 세상의 많은 것들을 보고 경험하고 좋은 것을을 알아 버렸습니다. 감정을 배웠고 관계를 쌓았습니다. 자취를 남기기 시작한 어린아이를 이제 전 세계가 사냥하려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가슴아픕니다. 꼭 연좌제 같잖아요. 하지메의 모태가 조커라서 하지메가 그런 심한 꼴을 당해야 한다니 이것은 너무 괴롭습니다.
공격당해 도망친 하지메를 주운 건 타치바나씨와 무츠키입니다. 타치바나씨와 무츠키는 많이 닮았지만 무츠키가 조금 더 무른 면이 있죠. 하지만 제가 언제나 말해왔듯 타치바나씨는 '인간'의 수호자니까.. 그런 결정을 하는 건 가장 타치바나씨답다고 생각합니다.
47화에서 이 장면을 제일 좋아합니다. 약속이라는 형태의 거짓말이 이 장면을 비극적으로 만드는 키워드가 되고 있습니다. 연출 역시 여러 장면들이 겹쳐져 이 장면의 고통스러움을 배가시킵니다. 타치바나에게 있어서 하지메는 조커에 종속된 존재입니다. 즉 조커와 하지메가 독립된 존재로 인정되지 못하는 것입니다.타치바나가 하지메를 볼때마다 그는 늘 하지메라는 존재 뒤에 버티고 선 조커의 존재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런 장면들에서 그는 조커가 아닌 하지메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지메는 조커가 아니라 인간이기에, 그 모습이 타치바나씨를 갈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에겐 인간이 아닌 존재가 가장 인간적인 대화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죠.
그리고 그 순간이 타치바나씨를 움직입니다.
이 장면은 타치바나씨의 이기심이 보여지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인간 세계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그는 많은 것을 잃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건실했던 직장, 건강한 신체... 그가 세계를 지킬 수록 타치바나는 자신의 것을 잃어 갑니다. 그가 이 싸움에 남은 것은 그 모든 것을 지키지 못한 자신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감 때문입니다. 그 무게가 타치바나의 자신을 포기하고 인간의 대의를 위해 싸우게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건 마지막 싸움에서 그는 가장 이기적인 선택을 합니다. 세계가 아니라 켄자키를 선택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타치바나씨의 선택은 항상 인간 세계의 수호를 향해 왔습니다. 그것을 위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어버린 타치바나씨가 마지막까지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은 믿을 수 있는 동료였습니다. 자신을 기다려준 동료를, 나아가서는 그 동료들의 선택을 믿겠다는 건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의 논리적인 선택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도 카테고리 킹은 그부분을 지적했구요.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실감하는 가장 마지막 순간에 가장 이기적이게 됩니다. 그 유혹의 순간에 세계나 사명을 선택하는 것보다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욕심을 바라겠다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저는 타치바나씨가 마지막까지 고귀한 사명감으로 싸웠다면 조금 슬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세계 정도 멸망하면 어때요 타치바나씨가 후회하지 않는다는데.
안돼 시발 바퀴벌레천국이잖아 타치바나씨 왜그랬어요
블레이드 48화를 봅시다
ㅇ아악 살려줘 미쳤나봐 여기 너무 대박적으로 연출이 공포영화 및 재난영화의 도입부 같아서 미칠 것 같습니다. 아니 바퀴벌레가 많이 강력하긴하는데 왜 인간 소멸용으로 바퀴벌레를 갖다가 쓰는거예요 왜 조커가 바퀴벌레야 어떻게 보면 말이 되긴 하네요 조커는 비장의 패고 비장의 패인만큼 강력하고 임팩트가 있어야겠지요 파리 모기 이러면 별로 실감이 안나잖아요 바퀴벌레 곱등이쯤은 되어야 비장의 수로 모든이들을 경악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너무 효과적이어서 저는 지금 쟤들 나올때마다 내면의 비명을 수천번은 지르고 있습니다.
불쌍한 경관님들 사진을 쓴 것은 제가 그놈들을 굳이 캡쳐해서 (안그래도 여기 몇장 넣었는데) 또 넣을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보시는분들의 안구건강 및 멘탈건강 그리고 작성자 저 본인의 건강을 위하여 그들의 형상을 업로드하는 것은 최소한으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런 종류의 여캐들의 특징은 언제까지고 상대역을 위해서 하염없이 인내하는 고래심줄같은 인내심의 소유자라는 것이죠. 노조미는 그 오랜 무츠키의 탈선 동안 그를 버리지 않고 기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속에서 열불이 올라올 상황에서도 그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노조미의 수많은 장면 중에서 이 장면을 가장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노조미가 자기 요구를 저렇게 강하게 외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노조미는 포지션상 타치바나씨의 사요코와 연장선상에 있는 캐릭터인데요, 사요코씨는 타치바나씨에게 직간접적으로 이 일을 그만두자, 떠나자고 권유해왔지만 실패했었습니다. 노조미 역시 무츠키가 비행청소년이었을 시절부터 비슷하게 그에게 돌아오라고 애원해왔습니다. 사요코씨와 노조미의 대비되는 점이라면 사요코씨는 가면라이더라는 운명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했고, 노조미는 결과적으로 가면라이더라는 운명을 수용하게 되었다는 것이 다릅니다. 이 차이점은 두사람의 결말에도 큰 차이를 낳았다고 보는데, 사요코씨는 결국 사망하게 되는 반면, 노조미는 아직까지 생존해 있습니다. 전 그래서 노조미가 이대로 그냥 무츠키의 가면라이더 인생을 인정하고 결말까지 그를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봐주는건가 했거든요. 그런 노조미도 마지막을 실감하는 순간에는 자신의 욕망, 자신으로 화살이 돌아옵니다. "데이트는 언제든지 할 수 있잖아" 라며 보내주었던 이전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입니다. "가지마!" 라는 외침에는 그녀의 가장 깊은 본심이 담겨 있습니다.
놀랍게도 하지메가 조커에 파묻혀 버린 지금 카메라에 잡히는 달은 만월이 아닙니다. 달이 지금 저상태인건 하지메 그래도 나름 노력하고 있단 뜻일텐데요. 아직 하지메의 의식이 남아 있는 걸까요?
어둡고 좁은 골목길에는 바선생이 많이 모입니다. 정말 무섭네요.
역시 달이 맞았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혼란하지만 하지메는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아직 지키고 싶은 인간을 지킬 만큼의 힘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여기저기 터져나가고 있는 댐 앞을 겨우 막고 있는 것에 불과한 하지메는 점점 지쳐가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48화에서, 아니 블레이드 전체를 통틀어 가장 비극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하지메의 무력함을 발견한 사람이 켄자키라는 것이 가슴을 한 켠을 찌르고 지나갑니다. 20화를 보면서 어째서 하지메에게 켄자키가 필요한 건지 어렴풋이 알겠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었습니다. 사실 그때는 저는 자신을 중요하게 보지 않는 켄자키에게 자신을 찾으려고 애쓰는 하지메가 서로 끌린 게 아닐까 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부재한 것을 타인에게서 찾는 경향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장면을 보니까 알겠습니다. 왜 켄자키가 하지메를 보는 건지. 켄자키는 하지메에게 끌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하지메는 켄자키 자신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지메에게서 오래 전에 부모님을 구하지 못한 가장 무력한 존재였던 자신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수많은 상황 속에서도 하지메 뒤에 있는 조커가 아닌 아이카와 하지메만을 들여다 보고 그를 똑바로 불러줄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하지메의 모태인 조커를 알게 되면서부터 켄자키 주변 사람들은 하지메를 지칭할 때, 두 가지의 칭호를 섞어 사용해왔습니다. 조커와 하지메입니다. 그러나 켄자키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지메를 부를 때 '하지메'라고만 불렀습니다. 그는 조커라는 불길 속에 놓여있는 하지메라는 존재를, 가장 처음부터 그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하지메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그건 어쩌면, 과거의 자신에 대한 구원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하지메가 무력감에 자신을 포기하는 순간을 본 켄자키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어떻게든 그를 구하고 싶다고, 필사적으로 바라지 않았을까요.
그 순간 켄자키에게 한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갑니다. 후반부에서 블레이드는 피를 강조하는 컷이 몇번정도 있었는데요. 아무것도 없이 피만 강조하는데도 켄자키 본인이 현재 인간과 언데드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중이어서 그런지 이런 클로즈업 신이 상당한 무게감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마지막으로...
블레이드 49화입니다.
으아아악 그만해! 이런 것까지 세기말 4DX 체험 시켜줄 필요가 없어요! 쓸데없이 고증엔 또 충실해서 문제입니다! 이런건 강건너 불구경 기분으로 봐야 제맛인건데 쟤들이 나오는 바람에 너무 실감나게 보게 되어버렸습니다 제작진의 한수가 너무 강력해요 정말 미쳐돌아버리겠군요
아니 지난번에 제가 소장님 조사하러 티베트간다는 거 핑계아니냐고 했는데 정말이었습니다. 말이 씨가되네..
지난화에서 뭔가 깨달은 게 분명하군요. 켄자키 지금 일부러 킹폼 남용하면서 자기 자신을 언데드로 바꿔가고 있습니다. 저 웃음은 이미 마음을 정한 사람의 미소입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선택으로 인한 운명을 보았고, 그 길을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결심에 응하여, 마지막 대면이 이루어집니다. 하지메의 "너와 나는 싸움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밖에 없어" 라는 대사가 여기서 한번 더 나오는데요. 왜 이 대사가 두번씩이나 강조되는 걸까요. 초반에 나왔을 때에는 진검승부를 강조하는 맥락인가 싶었지만, 후반에서 다시 반복되니 무언가 다른 의미가 있는가 곱씹어보게 됩니다. 어쩌면 그 말은 하지메가 자신을 언데드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조커는 언데드도, 인간도 아니지만 동시에 어느쪽도 될 수 있습니다. 하지메는 휴먼 언데드에게서 태어난 하나의 인간이지만, 그는 오랜시간동안 조커의 특성에 의해 언데드의 생활방식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가 인간과 교류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 하지메에게 있어서 자신을 인간으로 정체화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마치 늑대들에게서 길러진 인간의 아이는 사회화 과정을 거치지 못하는 것처럼요.
언데드는 인간과 오랜 시간동안 싸워왔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본능이자 삶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인간과 인간은 다투기도 하지만, 때로는 대화와 소통을 통해서 삶을 지속해 나가기도 합니다. 켄자키는 하지메를 인간으로 보기에, 그와 싸우지 않고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메는 아직도 자신을 완전히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켄자키를 언데드로서 가까이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쓸데없는 생각이었습니다. 곰곰히 생각하다보면 너무 깊게 들어가서 딴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그냥 단순히 어그로 끈 걸수도 있죠 뭐.
지금까지 하지메를 하지메라고만 불러왔던 켄자키가 처음으로 하지메가 아닌 조커를 부르는 순간. 그가 지금 싸우는 건 하지메가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있는 불길인 조커인건 아닐까요. 가장 마지막까지도 하지메에게는 직접적으로 검을 겨누지 않았던 것이 인상적입니다. 초반에 뭣도 모르고 서로 치고박았던건 뺍시다.
그리고
켄자키의 선택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어쩐지 저에게는 그렇게 들렸습니다. 네가 불길 속에서 힘들다면 내가 대신 여기 있어줄게.
내가 그 무력함을 알고 있다. 널 위해서 내가 대신 여기 있어 함께 싸워 주겠다. 그러니
" 넌 인간들 속에서 살아가. "
그리고 싸움은 끝나고, 세계는 지켜졌으며, 하지메는 하지메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47, 48화를 통틀어 타치바나씨도, 노조미도 마지막을 실감한 순간엔 가장 자신의 욕망에 가까운 이기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켄자키는 최후의 최후까지 타인을 구할 수 있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것을 주고 갔습니다. 그 모습은 하지메의 카드를 찾기 위해서 무츠키에게 라우즈 업소버를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던 때부터 보였습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인간성마저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주변의 인간들을 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켄자키에게 삶의 의미란 자기 스스로의 이득보다 타인의 구원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그 선택은 가장 이타적이면서도 가장 그를 위한 이기적인 선택이기도 합니다. 세계가 존재하는 한 켄자키는 계속해서 살아갈 의미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가 불길 밖으로 내보낸 과거의 자신이자, 무력한 한 아이인 아이카와 하지메를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런 개인적인 사정들을 제하면 그는 정말로 자기가 꿈에 그리던 모두를 지키는 히어로가 되었습니다.
은행나무는 희망, 그리고 평화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화석이라는 이명에 어울리게도 장수, 인내 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 길을 글라디올러스 꽃을 안은 하지메가 걸어가고 있다는 것은 앞으로 그가 걷게 될 운명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그는 인간으로서 살 수 있게 되어 평화와 희망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어쩌면 영원에 가까운 시간동안 자신의 단 하나의 이해자이자 구원자였던 켄자키와는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지메에게는 슬프고 안타까운 일일 것이나, 켄자키는 정말로 그의 곁에 자신이 없더라도 다른 수많은 인간들이 그와 함께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켄자키가 만약 그 불길에서 누군가에게 구원받았었더라면, 켄자키 역시도 그에게 존경과 애정을 보낼 수 밖에 없었을 텐데요! 이래서 사람이 경험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 상황에서 켄자키가 저울질하고 있던 것은 세계와 하지메와 그리고 하지메와 함께하고 싶은 자신 이었으므로 천칭이 왼쪽으로 기우는 건 당연한 결말이겠습니다.
블레이드 49화가 모두 끝났습니다. 켄자키와 하지메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좁게 이 작품을 본다면 이 결말은 모두가 행복한 가운데 둘만 슬픈 결말이 된 메리배드엔딩...이 아닐까 싶은데요. 만남이 있다면 이별이 있고 그 와중에 다시 만날 수도 있겠지만요...이 엔딩이 안타까운 것은 켄자키와 하지메가 살아갈 그 이후의 운명이 영원의 시간이라는 것을 우리가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영원을 하지메는 하지메 나름대로, 켄자키는 켄자키 자신이 말한 대로 운명과 싸워나가며 살아가겠죠. 하지만 켄자키는 그 영원을 견딜 수 있을까요. 억겁의 시간이라는 무게를 인간이었던 그가 지고나갈 수 있을지가 개인적으로는 걱정이 됩니다. 그리고 켄자키가 하지메와 헤어지며 스치는 일도 없을 거라 단호하게 말했던 것도 비극성과 안타까움을 배가시킵니다. 그건 어쩌면 이제 막 조커가 된 켄자키가 언데드의 본성을 제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급하게 하지메를 밀어낸 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엔딩이 하지메와 켄자키를 통틀어 모두에게 가장 최선인 해피엔딩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켄자키는 하지메를 구함으로써,'인간'이자 인간에게도 인정받지 못해 무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를 구원했고, 그 구원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지켰습니다. 하지메는 켄자키에게 구원받음으로써, 아이카와 하지메라는 존재를 지켰으며, 광활한 세계와 억겁의 시간을 함께 견딜 동류-조커-를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은 마치 검처럼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운명의 검을 쥠과 동시에 켄자키는 인간성의 상실을, 하지메는 만날 수 없음이라는 대가를 치룰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모든 선택에는 양면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 검을 가지고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며, 어떤 삶을 살아나갈 것인가. 그건 어쩌면 가면라이더 블레이드가 당신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면라이더 블레이드의 모든 캐릭터는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이 가져다주는 결과에는 항상 댓가가 따라왔습니다. 켄자키나 하지메 뿐 아니라, 타치바나씨는 계속해서 싸우기로 결심한 순간 사요코를 잃었고, 무츠키는 라이더를 하기로 결심한 순간 자신의 어둠과 싸워야 했습니다. 플레잉 카드의 4개의 카테고리는 4계절의 의미도 담고 있다고 합니다. 그 카드를 모으며 보낸 일년 남짓의 시간동안 주연 뿐 아니라 조연들도 그들 나름의 결심을 했고 그에 따른 댓가를 감내하며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배틀 파이트가 끝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선택을 하고 주어진 운명과 싸우며 나아갈 것입니다. 그렇기에 블레이드는 그렇게 노래하는 게 아닐까요. 마음에는 검을, 빛나는 용기를. 마음에 당신의 선택을 품고, 빛나는 용기를 가지고 나아가라고. 가면라이더 블레이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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