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를 보다 말고 디케이드로 날라버린 지도 어언 몇 개월이 지났습니다. 디케이드의 완주도 끝났고 이제 슬슬 오즈로 돌아갈까 했던 저에게 한가지 방해물이 나타났으니, 그것은 바로 일순간의 욕망을 참지 못했던 과거의 저였습니다. 과거의 저는 지인의 급조짤을 온 천하에 공개하는 조건으로 오즈를 이어봐야한다는 사실도 잊고 드라이브를 보겠노라며 호언장담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변 지인들이 다들 드라이브를 완주한 탓에 본의아니게 마이너리티로 전락한 저에게 드라이브를 봐야 한다는 압박감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약간의 외압도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저만 드라이브 모르는 뇌로 남아있기는 아까우니, 결국 큰맘 먹고 푹티비를 결제해 이번엔 한국어 더빙으로, 가면라이더 드라이브를 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처음에 TTFC로 시청하려고 했었는데요, 테마 특성상 어려운 용어가 제법 나오는지라 야메 일본어로 근근히 먹고살아온 저는 1화를 보는 내내 내용의 50%정도밖에 이해하지 못했거든요. 게다가 더빙판은 개인적인 이유로 체크해보고 싶었던 것도 있었기에 저는 그 길로 망설임없이 가면라이더 드라이브 주행을 시작했습니다.
아래 글은 가면라이더 드라이브 1~12화의 전반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해당 작품을 보신 뒤에 읽어주시길 권해드립니다.
가면라이더 드라이브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아이들이 열광하는 자동차 요소를 인기 특촬 시리즈 가면라이더로 만든 것입니다. 드라이브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제가 사전에 알고 있던 사실은 '자동차'라는 절대 안 팔릴리가 없는 인기 보증수표 컨텐츠를 절망적인 장난감 기획으로 인해 말짱 도루묵으로 만들었다는 것, 대신 주인공 배우는 스포츠카마냥 흥행 대로를 달려 이제는 다시 토에이가 캐스팅할 수 없는 몸값의 대배우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 보라색으로 떡칠한 귀여운 친구가 저의 취향상을 하고 있다는 것 세가지 정도였습니다. 오밀조밀 갓구운 찹쌀떡처럼 말랑말랑할것 같은 얼굴이 얼마나 귀여웠던지 드라이브를 보게 되면 이 친구를 잔뜩 애정해주겠노라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을 정도니까요.
아무튼 가면라이더 드라이브는 여타 특촬과 다를 바 없이, 뭔가 난장판이 일어나면서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봐온 특촬들 중에 1화에서 난장판이 없었던 작품이 하나도 없었어요. 넓은 범위에서는 국가 재난이 일어나거나 하다못해 좁게는 주인공의 옷이 팬티만 남고 사라지던지 무슨일이 꼭 일어납니다. 그게 바로 이 작품의 기본 세계관이 되는 '이 동네에서는 대체 뭔 일이 있었나' 라는 과거설정입니다. 드라이브 세계관은 로이뮤드라고 불리는 기계 생명체가 일으킨 글로벌 프리징 - 소위 슬로잉 현상이 만연한 세계입니다. 여기까지 보고 아 그렇구나 이 작품은 이런 설정이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끄덕하고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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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말해주지 않으면 증식형 안드로이드인줄도 모르게 생긴 로이뮤드들과,
가끔 CG에서 벗어나면 재질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처량함을 배가시키는 미니카,
그리고 교통경찰인지 스포츠카 영업사원인지 분간이 안 가는 차량을 몰고 다니는 주인공이 차례로 등장하여 저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컬러링을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빨간 차 누구나 몰고 다닐 수 있죠. 그런데 차체 형상 자체가 투머치 디자인이잖아요.
뿐만 아니라 주인공 주변의 인물들도 과장되게 두드러지는 강력한 캐릭터성을 하나씩 보유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헤이세이 2기 들어오면서부터 캐릭터성의 각인을 위해 현실감보다는 컬러링이나 디자인, 설정 등에서 과장되게 극대화된 부분들이 상당히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이브의 세계관은 그저 가볍기만한 허울 좋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스토리라인의 흐름 밑에 차분하게 이후에 있을 큰 사건의 떡밥을 계속해서 깔아놓고 있거든요. 가장 초반에서부터 의미심장한 문구나 대사를 여러 번 복선으로 깔아둠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왁자지껄한 세계가 탄탄한 기반을 가지고 나아가고 있으며 모든 이야기가 갑자기 뜬금없는 전개를 맞지 않을 것이라는 안정감을 줍니다.
특히 이 작품의 적대자로 설정된 기계생명체, 로이뮤드에 관련하여 세심하게 설정해두고 있다는 인상을 스토리의 진행에 따라 계속해서 받았습니다. 이들이 중가속 입자라는 것을 이용해서 슬로잉 현상을 일으킨다던가, 이상적인 신체를 얻기를 원해서 인간의 형체를 복사하고, 고동소리까지 만들어낼 수 있는 등 로이뮤드의 기원과 그들이 어떤식으로 행동하고 있는지 처음부터 전부 확립된 상태에서 이야기를 탄탄하게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드라이브에서 제 눈이 가게 되는것은 아무래도 사심을 제하고서도 로이뮤드들의 간부 일행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전신을 보라색으로 휘감은 베이비페이스의 양아치를 밀어내고 저를 1화에서부터 사로잡고만 친구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똑똑하고 현명하며 신중한 브렌님이 되시겠습니다. 얼굴만 봤을때는 체이스가 그렇게나 귀여울 수가 없었는데 안타깝게도 타이밍이 너무 늦었습니다. 브렌님은 2화에서부터 나오시거든요. 그리고 똑똑하고 신중한 브렌님은 그 한 순간의 분량도 허투루 쓰지 않고 자신의 매력포인트를 100%로 발휘하여 화면 너머의 저를 사로잡고 마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라식과 라섹이 발달해 전 인류가 안경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21세기에 참된 안경의 존재의의를 온몸으로 알려주고 있는 아름다운 각도의 얼굴입니다.
그 귀여운 얼굴로 오렌지 주스를 개박살내는걸 조금 더 빨리 했으면 체이스 너에게도 기회가 있었을 텐데 안타까운 녀석
잠시 브렌님의 얼굴에 홀려 다른 소리를 해댔는데요. 아직 초반이라 그들이 직접적으로 활동하는 면면이 적긴 하지만, 브렌은 앞으로의 이야기 진행을 짐작할 수 있는 의미심장한 대사들을 많이 해주고 있습니다. 덕분에 현재 제가 초반부에서 개인적으로 주목하고 있는 것은 로이뮤드와 인간과의 관계도인데요. 현재까지 로이뮤드에 대해서 공개된 사실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그들이 기계 생명체이고 1부터 108까지의 '번호'가 부여되어 있다는 것
2. 브렌은 폭력적인 방법을 지양하고 있다. (방법을 벗어난 로이뮤드들을 체이스를 통해 파괴->재생으로 재탄생 시킴)
3. '약속의 날'까지 정해진 숫자가 각성에 도달할 것.
여기서 저는 드라이브 세계관이 일부 힌두/불교적 세계관을 차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가설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걸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로이뮤드의 숫자 108입니다. 숫자를 일부러 특정해서 지정한 것은 거기에 의미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숫자는 불교에서 말하는 108번뇌를 말하고 있는 거겠죠. 불교가 수행을 통해 번뇌를 끊어내고 해탈의 경지를 추구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 로이뮤드라는 존재는 굉장히 독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긴게 엄청 무섭게 생기긴 했지만 사실 글로벌 프리징 이후로 로이뮤드가 인간을 직접적으로 해하는가 하면 저는 거기에 약간 의문입니다. 슬로잉 현상을 만들어내고, 인간의 얼굴을 복제하긴 하지만 형상을 카피할 뿐이지 시체를 만드는 건 아니거든요. 기본적으로 로이뮤드가 원하는 것은 일종의 '각성'으로, 진화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로이뮤드는 욕망을 가진 인간의 기억이나 형상을 매개체로서만 사용합니다. 그냥 복제만 하는 거죠. 그리고 그중에서도 폭력적인 방법으로 정도를 벗어난 로이뮤드는 처분된 뒤 다시 태어납니다. 이 과정은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를 생각나게 합니다. 수행과정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체이서에 의해 죽고, 다시 태어나 처음부터 각성이라는 해탈을 향한 수행을 시작하는겁니다. 체이서의 초반 대사들을 보면 자신은 로이뮤드에게 기회를 준다는 말을 하는데, 이런 점에서 이들이 약속의 날을 위한 일종의 수행을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약속의 날까지의 수행을 반복하는 이들 로이뮤드 자체가 108번까지의 번뇌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은 조금 독특한 부분입니다. 일반적으로 본다면 이 수행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은 로이뮤드가 아닌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작중에서 인간은 로이뮤드를 살뜰하게 격파해 나가면서 글로벌 프리징이라는 재해의 근원이었던 번뇌요소를 해소해 나가고 있죠. 로이뮤드는 단순히 제거해야만 하는 악이고, 신노스케와 키리코 등 드라이브 내의 캐릭터들에게 좋든 싫든 인생의 가장 큰 사건 중 하나에 얽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게다가 신노스케의 말하는 벨트, 크림 씨도 로이뮤드와 얽혀 있습니다.
드라이브는 거기서 로이뮤드가 정말로 악일까 하는 의문을 초반에 조금씩 깔아놓습니다. 특히 4화에서 7화까지 이어지는 액체폭탄, 건설사 붕괴 에피소드를 보면 악한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하고 역으로 물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베이비페이스 양아치 마진 체이서입니다. 전신을 팬톤 2018컬러 울트라 바이올렛으로 도배한 이 친구는 조신하게 생긴 얼굴과는 달리 툭하면 주변에 폭력적으로 굴기 때문에 저를 조금 당황스럽게 했습니다. 드라이브를 보기 전에 그는 인간의 규칙에 집착하는 캐릭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보아하니 처음부터 인간의 규칙에 집착했던 건 아닌 모양입니다. 드라이브 8화를 기점으로, 그는 자신에 대해서 큰 의문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노스케의 앞을 막아선 키리코의 모습을 보고 체이스는 크게 동요하게 됩니다. 그것은 '로이뮤드는 잘못을 속죄할(죽어서 다시 태어남으로) 기회를 가지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기에 그저 악하다'는 그의 인간 성악설에 전면으로 반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함께, 에피소드 8화에서 가면라이더 드라이브는 인간들이 악한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나약해 쓰러지거나 서로를 믿지 못하거나, 혹은 속이더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에 맞추어 체이스는 자아정체성의 혼란을 맞이하고, 자신의 본체를 마주하게 됩니다.
언제나 신중해 등장 분량도 적은 브렌님이 남긴 "체이스는 이제 한계다." 라는 말과, 에피소드 10화에서 크림이 로이뮤드는 사실 인간이 만든 생명체라는 폭로를 감안하면, 그의 본체의 모습은 상당히 의미심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분명 로이뮤드는 1번부터 108번까지 108체 존재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로이뮤드의 기원이 인간이라면, 체이스는 어디서 온 걸까요? 이 의문은 드라이브 1쿨에서 가장 주요하게 던져진 떡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계관이 탄탄하고 설정이 꼼꼼한 이 작품도 이상한 지점에서 허술한게 마치 수능 수학영역에서 4점짜리는 다 맞춰놓고 2점짜리를 계산실수로 틀려오는 전교1등 같습니다.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 탄탄한 스토리라인, 오지는 설정을 가지고 키리코가 왜 드라이브를 할 수 없었는가에 대해서 여태 답을 안 해줬거든요.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지인에게 살짝 물어봤었는데 끝까지 이유가 안 나오는 모양입니다. 신노스케가 라이더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걸 제대로 만들어줘야하지 않겠어요? 그것도 없이 스펙이 개쩔고 드라이브 프로젝트를 아는 사람이 있는데 이 친구가 신노스케가 등장하지 않았던 공백기에 활약하지 못한 이유는 안 만든것이 무슨 장자상속시스템도아니고 아무런 설명이 없다는 게 조금 화가 납니다. 100% 완벽한 설정덕할 뻔 했는데 2% 부족해서 찜찜하게 됐잖아요.
여기에 더해 신노스케는 잘생긴 얼굴로 꼰대 할아버지같은 소리를 잊을만하면 뱉어서 아름다운 얼굴과 진보자유적인 젠더의식정신은 별개의 존재라는 현실감을 무섭도록 일깨워줍니다. 그렇습니다 살아가면서 다들 허우대 멀쩡한 사람들이 입을 열면 경악할 만한 발언을 거듭하는 것을 보고 실망을 금치 못했던 적을 한두번은 했을 것입니다. 얼굴만으로 남의 인격을 함부로 상상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교훈을 신노스케의 캐릭터를 통해 저는 여지없이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키리코의 캐릭터에 대해서 계속해서 편견을 강화하고 있는 부분이 약간 맘에 들지 않아가던 차에, 드라이브 1쿨 분량이 마무리되면서 새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아무래도 이 친구가 드라이브의 2호 라이더인 '가면라이더 마하' 인것 같습니다. 쿠쿠 밥솥짤로 그를 접했던 저로서는 그가 아메리카 라이더였다는 새로운 사실을 접하고 매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태껏 전세계급 재앙이 발생해도 일본인 가면라이더만 조명했던 기존 시리즈들과 달리 미국에서도 활동하는 라이더가 있다니?! 이렇게나 글로벌한 설정이 있을 수가! 괜히 글로벌 프리징이라는 단어를 붙인 게 아니었군요.
미국물 먹은 라이더는 라이더활동도 미국 엔터테인먼트 쇼처럼 합니다. 여태껏 심각하고 진중하게 변신해온 수많은 일본 라이더 에피소드를 가볍게 뛰어넘는 엔터테인먼트감에 저는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가면라이더 마하가 등장하는 첫 순간을 보며 저는 일본 드라마가 아닌 자본을 겁나 쏟아부어 만든 미드 1화의 파일럿 필름 혹은 아메리칸 갓 탤런트를 떠올렸습니다. 굉장한 캐릭터입니다. 이 캐릭터의 등장으로 지금까지 안정화되었던 국면이 여러가지 의미로 큰 전환점을 맞게 되는 것은 기정사실인 것 같습니다. 가면라이더 마하, 고우(로컬명 고우현)의 등장 이후 드라이브가 어떻게 변화되어갈지 앞으로도 계속 흥미롭게 지켜보겠습니다.